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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문화 이야기는 양은희 박사의 이미지 칼럼입니다. 2009년 '양은희의 시각문화 이야기'로 시작하여 2022년부터 '양은희의 도시문화 이야기'로 개편하여 매주 <델코지식정보>를 통해 소개됩니다.
![]() 1869년 런던 로얄 예술 아카데미 전시장1768년 설립된 로얄 예술 아카데미는 영국의 대표적인 예술기관이다. 1868년 100주년을 맞아 벌링턴 하우스로 이주하였고 지금도 이곳에 위치한다. 이주한 후 웅장한 새 건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언론에 내부가 소개되곤 했다. 특히 여름에 열리는 전시가 가장 유명한데 좌우로 즐비한 그림을 보러 관람객이 모여든 장면이 인상적이다. | ![]() 1869년 런던 로얄 아카데미 중앙홀1768년 설립된 로얄 예술 아카데미는 영국의 대표적인 예술기관이다. 1868년 100주년을 맞아 벌링턴 하우스로 이주하였고 지금도 이곳에 위치한다. 이주한 후 웅장한 새 건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언론에 내부가 소개되곤 했다. 벌링턴 하우스에는 회화와 조각을 따로 전시할 수 있도록 공간이 나뉘었는데 신고전주의 양식의 조각상이 즐비한 중앙홀을 여러 관객이 둘러보고 있는 장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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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9년 이집트 대표환영 리셉션19세기 대영제국은 영토를 넓히고 있었고 제국의 위상에 걸맞게 런던에는 화려한 건축이 들어섰다. 그중 영국 귀족 서덜랜드 공작의 저택 스태포드 하우스는 여왕의 궁전을 능가할 정도로 화려함을 자랑했다. 수에즈 운하가 완성된 1869년 이집트 대표가 런던에 오자 공작부부가 환영 리셉션을 열어 맞이했다. 그만큼 이집트는 중요한 곳이었으며 결국 1882년 영국, 프랑스, 인도 연합군이 이집트를 점령한다. | ![]() 1869 7월 파리 패션19세기 중반 파리의 여성 패션은 과거 양식을 부활시켜 화려한 장식과 색조가 돋보였다. 허리를 강조하고 볼륨을 키우고 여러 층을 두기도 했다. 그만큼 여성이 자신을 과시할 만한 장소가 늘고 있었고 이러한 양식이 드레스 샵을 통해 인기를 끌면 신문을 통해 런던이나 뉴욕에도 곧 알려지곤 했다. 그림은 런던의 언론에 소개된 파리 여성패션 |
![]() 1859 군대환송 파티19세기 유럽 제국의 힘은 군대에서 나왔다. 크고 강력한 군대를 가질수록 식민지 개척이 용이했다. 그러나 정작 전쟁터는 아비규환이었다. 다친 군인을 구하고 치료하는 것도 어려웠고 사망자를 헤아리는 것도 어려워 전쟁마다 정확하게 얼마나 사망했는지 파악하지도 못했다. 양쪽 군인의 시신들이 한 곳에 매장될 정도로 사상자 관리도 엉망이었다. 그러나 전장으로 떠날 군인을 위한 파티는 성대했다. 그림은 마르세이유에서 출발할 군인들을 위한 환송파티. | ![]() 1859 나폴레옹 3세 승전 파티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근대화에 앞장선 군주로 오늘날 파리의 도시 구조와 5-6층의 아파트로 구성된 외양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이탈리아를 도와 오스트리아 제국을 패배시켰으며 1859년 오스트리아의 황제와 평화조약을 맺으며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인근 지역에 영향력을 미쳤다. 그의 재임중 프랑스 제국은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확대했다. 그림은 전쟁에서 승리한 나폴레옹 3세를 환영하는 파티. |
![]() 영국 최초의 학교빅토리아 여왕 통치하의 영국은 근대식 교육에도 공을 들인다. 1837년 런던에 설립된 Home and Colonial School Society는 여왕의 후원을 받으며 영국 최초의 여성 교사를 두었고 인도에서 온 인도인에게 교사수련을 받게 하기도 했다. 이 학교는 어린 학생을 위한 체육관과 놀이터를 두고 신체 건강에 신경을 썼 으며 학교 입구에는 ‘Holiness unto the Lord(주님께 거룩함)’이라는 문구를 크게 걸어서 기독교 신앙에 토대를 둔 곳임을 알렸다. 그림은 학교의 운동장. | ![]() 1843 루앙 파리 연결 기차 개통식프랑스 수도 파리와 그 북쪽에 있는 산업도시 루앙 사이에 기차가 개통된 것은 1843년이다. 이 노선은 프랑스 최초로 건설된 열차이기도 하다. 이후 1847년 북쪽 항구도시 르아브르까지 연장되어 사람과 물자를 운송하는 주요 노선이 된다. 영국에 기차노선이 먼저 들어서자 영국과의 교역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 만든 노선으로 건설 당시 프랑스와 영국의 사업자들이 합작으로 추진되었다. 그림은 1843년 5월 개통을 축하하는 행사 모습이다. |
![]() 체스트넛 힐-윌리엄 킹의 자택 1860미국 정치인이었던 윌리엄 킹은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으로 앨라배마에 토지를 구입하고 체스트넛 힐이라는 농장을 세웠다. 앨라배마가 주로 승격하자 상원위원이 되었고 이후 부통령까지 지낸 인물이다. 평생 독신이었고 동료 상원위원이자 독신인 제임스 뷰캐넌과의 조용한 염문 때문에 동성애자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농장과 저택은 1920년대 화재로 사라졌다. | ![]() 1860 권투시합-히난과 세이어19세기 영국과 미국의 대립은 스포츠로 이어지곤 했다. 1860년에는 미국 권투선수 존 히난과 영국 권투선수 톰 세이여가 영국 햄프셔주의 한 야외 경기장에서 세계 챔피언을 정하는 국제경기를 치른다.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2시간 30분 가까이 경기를 치른 두 사람은 무승부로 경기를 중단하게 된다. 지금은 역사상 최초의 세계 챔피언 권투 경기였다고 기록된다. |
![]() 반더빌트 뉴욕항 18601856년 대서양 횡단 승객선으로 건립된 반더빌트 호는 1858년 좌초되었으나 수리후 1862년 소유자인 반더빌트 제독이 해군에 제공했다. 반더빌트는 해운과 철도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재벌로 이 반더빌트호는 그의 말년에 야심차게 출범시킨 대서양 횡단용 증기선이었다. 이 배는 측면에 물래방아같은 외륜을 가동해 추력을 생성했다.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사업가 반더빌트는 반더빌트 제독이 되어 국가에 이 배를 헌납한 것이다. | ![]() 뉴욕 일러스트레이티드 뉴스파리, 런던에서처럼 뉴욕에도 삽화를 부각시킨 신문이 1859년 창립되었다. 그러나 사진의 발전으로 1864년 문을 닫고 Demorest New York Illustrated News로 바뀐다. 후자는 커버하는 뉴스의 폭이나 어조가 더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어쨌든 19세기 중반에 나온 원조 신문은 항구도시 뉴욕을 중심으로 빠르게 변하는 미국의 삶을 전달하는 중요 매체였다. 사진은 배가 붐비는 항구 모습을 배경으로 한 신문의 표지 |
![]() 1868 이디오피아 원정 지도19세기 아프리카의 제국 아비시니아(오늘날의 이디오피아)는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 위험에 유럽 제국에 도움을 청했으나 반응이 없자 급기야 영국의 선교사를 투옥하며 시선을 끈다. 이에 대영제국은 자국민 보호를 위해 징벌 원정에 나서는데 영국인과 인도인으로 구성된 부대가 길도 없는 산악 지대를 탐험하며 수도까지 들어가 인질을 구한다. 대영제국의 군사력을 보여준 사례로 회자된다. 지도는 당시 군대가 이동한 길을 보여준다. | ![]() 1866 뉴캐슬 보트경주대회영국에서 보트 경주가 시작된 것은 1829년이었다. 캠브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의 학생이 시작했고 이후 널리 퍼져가서 1866년에는 북쪽의 뉴캐슬에서 국제대회가 열렸다. 뉴욕 체육인들이 주선한 대회로 당시 영국인 헨리 켈리와 미국인 제임스 해밀이 국가대표로 경쟁하게 되자 사람들이 강변과 다리, 배를 타고 관람하게 된다. 결국 영국인이 우승하면서 원조의 힘을 과시한 바 있다. |
![]() 1864 클리프턴 현수교영국 브리스톨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에이번 강의 협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세우고 싶었으나 돌다리 기술만 있던 시기에는 불가능했다. 1864년 드디어 연철 체인을 이용한 현수교가 완성되었다. 산업혁명 시기 영국의 기술발전이 이룬 쾌거였다. 운영을 위해 초창기부터 다리를 건너는 사람에게 통행료를 받곤 했으나 자동차 통행이 늘어난 1920년대부터야 수입이 늘어났다고 한다. | ![]() 1861 퀸빅토리아 기차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인 앨버트 공은 테크놀로지와 신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19세기 대영제국의 영광을 이끌고 누린 부부는 격에 맞게 왕실전용 기차를 만들게 했고 런던을 떠나 스코틀랜드 등 여러 지역으로 갈 때 그 기차를 사용하곤 했다. 안에는 여왕 전용 라운지가 있었는데 사람들의 호기심을 사곤 했다. 1861년 한 신문이 그 라운지를 그린 삽화와 설명을 싣고 있다. |
![]() 1864 글래스고-1글래스고(Glasgow)는 스코틀랜드의 대도시로 오늘날 영국 도시 중 1인당 GDP가 세 번째로 높은 곳이다. 오래전부터 영국 해양무역의 거점이었고 산업혁명 시대의 주요 도시로 한때 영국 제2의 도시였다. 19세기 인구의 증가로 도시가 팽창하는데 유럽에서 인구 백만 명에 도달한 최초의 도시이기도 하다. 이미지는 당시 공장 늘고 한 가운데의 클라이드 강변으로 운송선이 즐비한 글래스고의 조감도 풍경이다. | ![]() 1863 기계식 우편 배송19세기 후반 런던의 늘어난 우편물을 빠르게 배달하기 위해 한 회사가 지하 기계 시설로 배송하는 시스템을 개발한다. 영국의 저명인사가 주주로 참여한 이 회사는 기술 개발 끝에 캡슐형 운반선을 제작했고 1863년 드디어 우체국에서 인근 지역에 약 600미터의 노선을 만들어 배송을 시작했다. 기계 문명에 대한 기대감에도 불구하고 크게 시간을 절약할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자 1874년 이 시스템은 중단된다. |
![]() 1860 리켓 증기 자동차1860년 영국의 토마스 리켓은 증기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자동차를 제작한다. 3개의 바퀴에 석탄 보일러와 엔진을 단 차로 당시 최고로 낼 수 있는 속도는 시간당 19마일이었다고 한다. 말 대신에 기계가 이끄는 차였기에 뒤 좌석에는 보일러공이 앉아야 했고 앞쪽에 탄 2-3명의 승객중 1명은 오늘날의 운전자처럼 기계 장치를 작동했다. 그러나 그 정도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 ![]() 1850 런던 브리지 역1831년 런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템즈강 위의 오래된 석조 다리인 런던 브리지(London Bridge) 대신에 아치형 구조의 넓은 다리가 들어선다. 이어서 1836년에는 런던 브리지 남쪽에 기차역 런던 브리지 역이 들어서는데 이용객이 늘고 수입성이 높아지자 연결 철도가 늘어났고 이어서 역사도 확장된다. 이동하기 위해 역사 주변에 모여든 시민의 수가 늘면서 번잡한 근대 도시의 풍경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
![]() 1845 런던 파노라마‘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는 런던을 소개하는 그림지도를 발간하기도 했다. 구매자 대부분이 런던에 있는 노동자와 신흥 중산층이었기에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의 면모를 알리고자 했던 것 같다. 이 지도에는 템즈강을 하단에 두고 도시 여러 곳을 소개하는데 맨 왼쪽 다리는 복스홀 다리이며 그 오른쪽은 올드 웨스트민스터 다리이다. 이외에도 트라팔가 광장, 서머셋 하우스 등 런던의 주요 건물도 표시하고 있다. | ![]() |